레알 마드리드와 평생을 함께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선수 시절보다 무려 35년간 구단을 이끈 회장으로써 레알 마드리드의 위대한 아이돌이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와 평생을 함께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마지막 업데이트: 04 5월, 2020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개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그 이름은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적 위인인 베르나베우 회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제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가장 오래 회장직을 맡았던 전인 존재, 베르나베우에 관해 이야기해보겠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일생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데 예스테는 1895년 알바세테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와 백작 부인의 7번째 아들로 5살 때부터 마드리드에 살기 시작했다. 산 로렌초 데 엘 에스코리알의 레알 콜레지오 알폰소 XII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축구를 접하게 된다.

형제인 안토니오가 레알 마드리드 유소년부를 창단하기 전까지 베르나우는 스페인 체조회 시설에서 연습했다. 베르나베우의 첫 포지션은 골키퍼였지만 동생, 마르셀로가 감독진을 설득해서 팀의 공격수인 센터 포워드를 맡게 된다.

베르나베우는 레알 마드리드 유소년부에서 3시즌을 뛰고 1914년, 드디어 1부에 합류했다. 데뷔 직후 3득점을 기록하며 베르나베우는 팀을 대표하는 공격수로 떠올랐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현역

이미지 출처: Realmadrid.com

현역 시절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베르나베우의 선수 경력에서 가장 큰 의문을 꼽으라면 한 번도 국가 대표로 활약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1922년, 딱 한 번 소집되기만 한 것이 전부다.

1920/21년 시즌을 빼고 1927년까지 베르나베우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현역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틀레티코로 이적하려 했던 과거가 있다. 소속 문제로 공식전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27년 은퇴하기 전까지 6시즌을 훌륭한 성적으로 마친 베르나베우는 79경기에서 68골을 넣었고 1917년 코파 델 레이와 9번의 중부 대회에서 총 10번의 트로피를 차지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최전성기를 이끈 베르나베우

선수로서 은퇴했다고 해서 사랑하는 팀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베르나베우는 변호사 면허까지 땄지만 법조계 대신 구단 이사회를 선택한다.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사회 사무국장으로 일했고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에는 재무부에서 근무했다. 1943년, 다시 돌아온 베르나베우는 이사회 추천으로 레알 마드리드 회장이 된다.

새로운 구장 건설을 첫 목표로 삼으며 구단 재정과 조직을 본격적으로 재정비했다. 그 결과 차마르틴 스타디움 근처 대지를 매입하여 은행 대출을 받고 새 구장 공사에 들어갔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

베르나베우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는 1947년 12월 14일, 새로운 홈구장의 문을 열었다. 7만 명 규모 구장은 이사회 투표 결과, 가장 큰 공헌을 한 회장의 이름을 따게 됐고 베르나베우는 이후에 스포츠 도시와 훈련장 개장에 애썼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

1950년대 초반까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베르나베우는 디 스테파노를 영입할 때까지 회장직을 굳건히 지켰다. ‘베르나베우 집권기’ 동안 레알 마드리드는 총 31번의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했다.

또 베르나베우가 함께 지휘하던 레알 마드리드 농구팀도 무려 55번의 대회에서 우승했다.

1978년 6월, 83번째 생일을 보낸 베르나베우는 간 합병증으로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무려 35년간 레알 마드리드 구단을 총지휘한 베르나베우는 구단의 황금기를 만든 최장기 집권 회장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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